[조선 한양] 광희문은 지금 복원 중 ㄴ 서울 방랑기


조선에 사대문이 있다면 사소문도 있다고 저번에 '[조선 한양] 한 때는 자하문, 지금은 창의문' 편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그 사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을 찾아가는 건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자주 가는 동대문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광희문 입니다.
흥인지문은 동대문을 찾는 사람에게 빼놓지 않고 들르는 관광명소라곤 하지만 한낮 사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을 찾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광희문 주변은 지금은 주택가가 되었고 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재대로 된 문도 아닌 광희문을 굳이 찾아본다는 건 아주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힘들죠...

광희문은 사소문 중 동남쪽에 있는 문입니다. 한 때는 시구문이라고도 불렀는데 광희문으로 시신이 성곽 밖으로 나가 매장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누각의 존재 자체가 없었던 문이지만 태조 5년에 2차 도성 수축 공사를 통해 누각이 세워지고 1711년 개축에 들어가 1719년 문루까지 완공되어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달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광희문이 된 것이지요.

광희문은 조선의 아픈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기도 한데 병자호란 당시에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기 위해 인조가 이 문을 사용했고 또한 1907년 7월 31일에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해산조칙이 공포된 후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황실 근위대인 시위대 제1연대 1대대와 제2연대 1대대가 무장투쟁을 전개, 일본군 보병 13사단 51연대 2대대, 3대대 병력과 기관총 3문, 남대문과 서소문 위병까지 전투에 투입시키며 마지막 남은 조선의 군대와 숭례문 근처에서 시가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때 사망한 대한제국군 100여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 늘어놓고 가족들은 찾아가 묻으라는 공고를 광희문에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 한 후에는 문루가 없어지기도 하였으나 1975년 문루와 함께 복원되었습니다. 하지만 광희문은 끝내 제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다른 성문들은 문의 구조가 안정감 있는 형태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곽이 잘려나갔다 하더라고 양쪽이 다 잘려나갔으니 그나마 문만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기에 안정감있어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흥인지문이나 저번에 소개해 드린 창의문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광희문은 뭔가 불안해보이고 부적절해 보입니다. 한 쪽으론 성곽이 연결되어 있고 한 쪽으로는 문루만큼 깊이 잘렸으니 보기에도 이상하고 불안해 보입니다. 물론 사라진 것 보단 낫겠지만 문루위에는 잡초가 가지를 뻗을 만큼 관리가 부실합니다. 얼마나 많이 부서지고 다시 세웠기에 돌의 색이 다 다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화재를 참 좋아합니다. 아니 유명한 문화재를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요... 숭례문 준공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만 하더라도 말입니다. 숭례문은 지금도 꾸준히 방문객이 드나듭니다. 하다못해 광희문 근처의 흥인지문만 하더라도 외국인 관광객이 드나들 정도니 말입니다. 창의문 유명하지 않은 문화재 중 나은 편이긴 합니다. TV에서 부암동을 홍보해 주는 바람에 나름 잘 팔리고 있습니다. 창의문에는 등산하는 시민, 부암동을 찾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있습니다만은 광희문은 웬지 외로워 보입니다. 주택가 한 가운데 자리잡은 광희문이다 보니 발길 닫는 사람 얼마 없고 유심히 봐주는 사람 역시 얼마 없습니다. 잡조가 길게 뻗어나가도 아무도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광희문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 입니다.
다만 사람들의 관심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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